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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도 소방관
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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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4-01-27
조회수
2387
내용

나도 소방관

 

저에게는 올해 만 스물두 살인 아들이 있습니다.

그 아들이 생후 육 개월 되었을 때 남편은 소방관에 임용되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아~ 그런 시절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아득하게 느껴집니다.

어제는 비 내리는 주말 이었습니다. 멀리서 온 동생가족과 어머니를 모시고 시 외곽에 있는 음식점에서 외식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즐기는 오찬은 삶의 휴식이고 여유입니다. 우리는 행복감에 충만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었습니다.

식당이 위치한 만천리에서 집이 있는 애막골로 향하는 도로는 새로 건설된 도로와 접하여 탄탄대로로 뻗어 있는 길이며 스피드 한 주행 기분을 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도로중 하나입니다. 어제는 차량의 통행이 많지 않았고 또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기에 시야도 좋지 않았습니다. 은은한 음악과 함께 포만감으로 느껴지는 기분은 최고의 편안함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도로의 중간쯤을 달려온 시점에 도로 중앙선에 연기를 내고 서 있는 두 대의 차량을 발견했습니다.

“어머나, 저기 사고 났나봐!”

라는 말을 하며 잠시 마음속으로 머뭇거렸습니다. 이유인즉, 나보다 먼저 지나간 차량 탑승자 중 누군가 신고를 했을 것이며 그렇다면 바로 구조대에서 출동 할 텐데 구지 나까지 끼어들어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현장을 스쳐 지나려는 순간 옆에 앉은 남편이 소리쳤습니다.

“차 세워!”

남편의 그 말에 반사적으로 갓길에 차를 정차했습니다. 남편은

“장갑 있어?”

라고 물었으며 저는 차량 청소 할 때 쓰는 목장갑이 운전석 문 주머니에 있음이 떠올라 꺼내어 건넸습니다. 남편은 장갑을 받아 쥠과 동시에 문을 열고 뛰어나가며

“신고해!“

라고 소리쳤습니다.

뒷좌석에 앉은 조카를 향해

“119에 전화해”

라고 얘기 하니 춘천이 주거지가 아닌 조카는

“이 장소가 어디인지 몰라요”

라고 말하며 제게 전화기를 건네주었습니다.

저는 119에 통화 하며 사고지점을 설명함과 동시에 몸은 이미 사고 현장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이후의 상황은 마치 영화의 영상 필름이 돌아가듯 제 눈을 통해 머릿속에 각인 되었으며 남편의 일거수일투족과 음성 하나하나 모두 또렷한 기억으로 들어왔습니다.

남편은 봉고차 운전자에게 먼저 갔습니다. 그 차량은 애막골에서 내려오던 남색 차량으로 만천리 방향 하행 1차선에서 앞 범퍼와 운전석 일부가 심하게 파손되어 좌측으로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운전자는 60대 가량의 남자로 운전석에 끼어 왼쪽 몸 상채를 창문 밖으로 향한 채 창백한 얼굴로 의식이 없어 보였습니다. 왼쪽 앞 타이어는 펑크가 난 상태이며 차체에서 기름인지 물인지 모르는 액채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운전자에게 무어라 말을 건네자 의식이 돌아온 듯

“아이고 아이고 나 좀 살려주세요.”라고 소리 치셨고

남편은

“이제 괜찮을 거예요. 구조차가 오고 있으니 바로 구조해 드릴게요. 조금만 참으세요”

라고 얘기하며 중앙선을 넘어와 엔진 부분까지 파손 되어 연기를 내고 있는 흰색 SM5 차량으로 향했습니다. 조수석 뒤쪽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남편은 뒷좌석 시트와 바닥에 있는 어린 아이들 세 명의 안전을 확인한 후 소리쳤습니다.

“아이들 먼저 다른 곳으로 옮겨”

어떤 여성 한 분이 현장에 왔으며 남편을 향해 사람들 건드리면 안 된다고 소리쳤습니다. 그 소리에 저는 ‘저 분이 소방관 이예요’라며 얘기 했습니다. 그러자 그 여성분은 ‘저는 간호사예요’라며 자신의 신분을 밝혔습니다. 그 순간 ‘천우신조’로구나 생각했습니다. 이 위급한 순간에 전문가가 둘이라니 이환자들은 살 수 있겠구나 라는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곧 그 간호사 역시 남편의 지시에 따랐습니다. 차 속에는 연기가 가득했고 매캐한 냄새까지 나고 있었으므로 남편은 문을 열라며 소리쳤으며 저 역시 조수석의 문을 열기 위해 차량 밖에서 온 몸에 힘을 주며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충격으로 잠긴 것인지 찌그러져서인지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습니다. 왼쪽 발로 차를 지지하며 다시 힘을 주니 기적처럼 차 문이 열렸습니다. 아, 그런데 아뿔싸~~

조수석에는 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순간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타고 있는거야’라는 생각이 들며 그렇다면 환자가 모두 여섯 명? 뒷좌석에 아이들 셋, 앞에 어른 둘, 그리고 봉고차 운전자까지. 암담한 심정이었습니다.

 

저는 걸을 수 있는 여덟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를 데리고 인도로 나왔으며 괜찮으니 여기 앉아 있어라 알려준 후 다시 차량으로 왔습니다. 얼굴에 피범벅이 된 채 울고 있는 네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기를 안고 나오니 아까 그 간호사 분이 나머지 한 명의 아이를 구조하며 자신의 RV차량 뒷문을 열어 넓은 자리를 확보해 주셨습니다.

남편은 혼자 앞좌석의 두 분을 구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으며 조수석에 계신 여성분의 왼쪽 눈 상처를 가리기 위해 수건을 요청했습니다. 다행히 제 코트 주머니 속에 손수건이 있었고 그것을 건네니 환자의 얼굴을 가려 주며, 괜찮으니 얼굴에 손대지 말고 조금만 참으라 얘기 하고 있었습니다. 의식이 돌아온 환자가 자신의 얼굴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내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손으로 문지른 겁니다. 남편은 눈꺼플의 찢어진 살점이 떨어져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아 손수건으로 가려준겁니다. 다시 운전자를 살펴보니 에어백이 터진 상태로 운전석이 뒤틀려 있었으며 두 무릎이 너무 좁다 싶을 정도로 구부려져 있었습니다. 얼굴은 조수석쪽을 향한 모습으로 에어백에 기대어 있었으나 운전석쪽 문이 열리지 않은 관계로 아직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습니다. 그 사이 봉고차 운전자는 고통을 호소하며 구조해 달라 요청 하고 있었고 남편은 곧 구조대가 도착 한다고 얘기했습니다.

 

몇 분의 시간이 흘렀을까 주변에 차량이 몰려들고 있었으며 운동과 산책을 하던 시민들도 인도 위에 여러 명 모여 현장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순간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양 방향 차량 소통을 위해 수신호로 차량을 보내었으며 그 사이 제 남동생도 교통정리를 도왔습니다. 잠시 후 한 차량의 창문이 열리더니 눈에 익은 얼굴이 보입니다.

“형수님, 무슨 일이예요?”

같은 아파트에 사는 남편의 직장 동료입니다. 그 분의 얼굴이 그렇게 반갑고 멋져 보인적은 처음입니다. 이 십 여년 동안 이웃이자 남편의 동료로서 가깝게 지내왔지만 예를 갖추어야 하는 사이이기에 어렵다면 어려울 수 있는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순간에 그 분은 구세주였습니다. 저는 안면몰수 하고

“어서 내려서 도와주세요. 남편 혼자 하고 있어요”.

조금 전 간호사분의 등장 이후 또 한 분의 소방관, 이제 전문가가 셋이 된 겁니다. 그 중 노련한 숙련 소방관이 둘....

이렇게 좋을 수가 있을까요?

곧 구조차량과 구급차가 도착했으며 구조차에서 내린 소방관 한 분이 앞바퀴에 버팀목을 고이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아 ~ 정말 잘하시네. 아무리 다급한 상황이어도 먼저 안전 확보를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남편은 구급대원들을 향해 부목과 들것을 가져오라 소리 치고 있었으며 구급대원들의 바쁜 움직임이 보였습니다.

 

곧 이어 경찰관이 도착했고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남편은 구급과 구조 작업을 하는 다른 소방관들에게 지시를 하고 있었으며 이제 각 파트를 나누어 구조를 합니다. 멋진 구세주인 이웃 소방관을 포함한 세 명의 소방관은 유압절단기를 사용해 봉고차 문을 열고 있습니다.

 

아직도 남편은 소리칩니다.

“아이들 먼저 구급차로 옮겨서 강대병원으로 후송해”

 

이제 저는 인도 위에 올라와 구경합니다.

차량 통행은 경찰관이 맡았고 RV차량에서 구급차량으로 아이들을 이동 시키는 구급대원들의 모습도 보입니다. 아이들을 실은 구급차가 병원을 향해 출발하자 또 다른 구급차에서 다른 들것들이 내려지고 봉고차 운전자도 차 밖으로 나와 들것에 실립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저는 봉고차 운전자의 두 다리는 없을 거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생각 했었습니다. 왜냐하면 차량의 파손된 모습을 보았을 때 그럴 거라는 예상을 할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들것에 실린 운전자의 두 다리는 모두 있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단지 고관절 부위부터 사선으로 틀어져 보일 뿐입니다. 승용차 조수석에 있던 여자 분도 들것에 실렸습니다. 그 분 얼굴은 제 손수건 대신 청결한 거즈로 드레싱 된 상태였으며 들것에 실리는 순간 옷이 흘러내리며 하얀 뱃살이 드러났습니다. 남편은 그 분의 옷을 여며 묶어줍니다. 한 편으로는 그 상황에서 속 살 보이는 것쯤이야 뭔 대수인가 싶지만 환자를 배려하는 세심한 마음이 보여 졌습니다. 마지막으로 승용차 운전자가 차 밖으로 구조되었습니다. 그녀의 두 무릎은 가로로 찢어져 있었습니다.

 

맨 처음 승용차 안에 들어갔을 때 에어백 위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그녀를 향해 아이들은 모두 안전하니 걱정하지 말라고 얘기하던 남편의 음성이 귓가에 맴돕니다. 위급한 상황에서 더 예민해질 수 있는 모정을 간과하지 않은 겁니다. 대상자가 들을 수 있던 그렇지 않던 구조하고 처치함과 동시에 대화로 안정적 심리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이었습니다.

 

사고 당사자들 모두 구급차에 실려지는 모습을 보며 우리도 현장을 떠났습니다.

함께 도움을 주던 간호사분의 차량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분께 연락처라도 물어 볼걸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병원으로 후송된 모든 분이 별 탈 없이 치유되길 간절히 기도 했습니다.

 

소방관의 아내로 살아오며 이런 현장을 목격한 것은 어제가 처음 이었습니다. 또한 남편의 현장 활동 모습을 본 것도 처음 이었습니다. 남편이 가끔 얘기 해 주는 현장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냥 그렇구나. 또는 고생했어요. 라는 짧은 대꾸를 무성의 하게 해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저에게는 그저 그런 뉴스에서 접하는 사고 중 하나일 뿐이었으니까요. 그러기에 제겐 감동이 일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어제의 경험은 제가 남편을 바라보는 시각의 새로운 터닝 포인트가 되었습니다. 근무 여하를 떠나서 현장에 뛰어드는 직업의식과 상황 속에서 일의 선, 후를 가려내는 직관력, 팀웍과 더불어 일의 효율적인 진행을 위해 지휘하는 리더쉽 등 저 사람이 나와 함께 자고 먹는 내 아이의 아버지, 내 남편 맞나? 싶을 정도로 새롭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자랑스러웠습니다.

 

차후 왜 차를 세우라고 했냐는 저의 질문에 남편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현장을 목격한 순간 봉고차운전자의 모습은 보였지만 승용차 주변에 사람이 없었으며 연기가 나고 있는 점 등을 미루어 화재가 날 수 있으므로 인명구조가 시급한 상황임을 감지했다고 했습니다. 사고임을 인지하고 차를 세운 시점까지의 시간은 채 1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 이었습니다. 같은 장면을 보면서도 저는 그런 판단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확실히 달랐으며 전문가가 왜 전문가인지를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오늘 한 번 이러한 경험을 했지만 남편과 다른 소방관들은 수시로 이러한 현장에 계십니다. 물론 그들은 일로서 접해야 하는 것이지만 우리 모두 똑같은 사람인지라 현장을 통해 받게 되는 충격은 대동소이할거라 생각됩니다. 집으로 돌아온 후 제 뺨에는 피가 묻어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남편의 외투에도 이 곳 저 곳 피 얼룩이 있었습니다. 흐르는 물에 피 얼룩을 씻어내는 것처럼 현장에서의 충격도 씻어 낼 수 있는 건가? 그에 대한 해답은 몇 시간이 지난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알 수 있었습니다. 알 수 없는 피로감과 가슴 떨림, 두려움 등이 저를 엄습해 왔습니다. 남편과의 대화를 통해 조금 상쇄시킬 수 는 있었지만 잠을 이루는 내내 악몽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저는 지금 이 글을 씀으로 인한 자가 치유를 기대해 봅니다.

 

그렇다면 제 주변에 계신 수많은 소방관들은 이러한 증상을 어떻게 다스리고 있는가? 라는 물음을 다시 한 번 해 봅니다. 소방관이기에 ‘괜찮다’라는 말은 언어도단입니다. 퇴근 후 팀원들끼리 모여 마시는 쓴 소주 한 잔으로 붉은 피로 얼룩진 사고 현장과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안타까운 형상들을 잊으라 하는 건 너무 가혹하고 무책임한 처사가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그간 가족과의 대화 속에 해 주었던 응급구조방법과 위험 대처법, 현장 무용담(?)등 흘려들었던 그 모든 이야기들이 잔소리 또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소방관 아내인 동시에 소방관이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전문가에게 교육을 받고 있었던 겁니다. 그 교육의 진가가 어제 드러났습니다. 구급대와 구조대가 도착할 때 까지 간호사분과 함께 우리 셋이 구조 활동을 펼치는 동안 그 누구도 동참해 주지 않았습니다. 모두들 인도 위에서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걱정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주저 없이 현장에 뛰어들어 구조대원으로서의 역할을 했다고 자부합니다. 저는 수 십 년간 전문가에게 교육받아온 사람이니까요. 인도 위의 구경꾼과 저, 교육 받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임이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제 어머니께서는 다른 구경꾼들을 향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을 하십니다.

“저기 보이는 저 사람이 제 사위예요~”

 

옛 말에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이 있는데, 저는 소방관 부인 23년차이니 풍월 정도가 아닌 진짜 소방관이 된 것 맞습니다.

 

제 어깨 위에도 반짝이는 소방관 계급장 하나 달아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