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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검과 악수하다
작성자
김용호
등록일
2010-03-14
조회수
1202
내용
주제 | 주검과 악수하다 | ||||
게시자 | 변전일 | 게시일 | 2010-03-12 18:25:54 | 조회수 | 259 |
행복한 동행이라는 월간지에서 공모한 직장문예대전 대상 수상작입니다. 소방관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정말 리얼하게 그린 글입니다. 구급대원으로서 공감하는 부분이 많아 여러 직원들이 공유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서울시 행정포털에 올라와 있는 글 펌합니다. 서울 동작소방서에 근무하는 유경문씨 글이랍니다. 주검과 악수하다. 앞서가는 고참의 옷자락을 생명줄인 양 부여잡았습니다. 놓치기라도 하면 끝장이라는 생각이 엄습했습니다. 사방에서 내뿜는 열기와 실내를 가득채운 연기는 금방이라도 공기호흡기 면체를 뚫고 목을 틀어막을 듯 맹렬했습니다. 그러나 나아가야만 했습니다. 손목이 얼얼하리만큼 그러쥔 관창에서 폭포수 같은 물줄기를 쏟아내 화마를 잠재워야했고, 겨우 두어 뼘이나 볼 수 있는 손전등의 빛은 공포에 휩싸인 누군가에게 구원의 빛이 되어야 했으니까요. 그때였습니다. 오리걸음으로 나아가던 발에 둔탁한 느낌이 전해왔습니다. 세간이겠거니 하며 밀어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손전등을 가까이 들이댔습니다. 시야가 닿는 순간, 그만 주저앉아버렸습니다. 비명소리조차 지르지 못한 채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습니다. 군 복무 중 할머니의 부음을 들었습니다. 천수를 다하신지라 평온한 얼굴이었습니다. 내게 주검은 할머니처럼 평온한 영면의 모습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날 심하게 그을리고 훼손된 주검은, 죽음의 또 다른 모습으로 각인되었습니다. 일 년도 채 안 된, 덜 여문 신참 소방관의 가슴에 ‘트라우마’ 라는 몹쓸 것이 그때부터 똬리를 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참혹한 주검은 그림자처럼 끈질기게 내 뒤를 쫓아왔습니다. 밥을 먹을 때도, 동료와 대화를 나눌 때도 불쑥불쑥 찾아와 평온한 내 의식을 맘껏 유린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경험이 쌓이면 무뎌지고 대담해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참혹한 주검의 모습들은 사고마다 조금씩 변형된 모습으로 내 기억 속에 차곡차곡 쌓여갈 뿐이었습니다. 나중에는 꿈속까지 쫓아와 나를 소스라치게 했습니다. 불면의 밤도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강단지게 마음을 다잡아보기도 하고, 종교에 의지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지난한 일상만이 반복되고 있을 때 설상가상으로 구급대원으로 보직이 변경되었습니다. 화재현장은 물론이며 온갖 사건사고에서 환자를 응급처치하고 병원으로 이송해야하는 업무 특성상, 나는 이제껏 보지 못한 다양한 주검들과 맞닥뜨렸습니다. 지하철 철로위에 신체 일부가 절단되어 널브러진 주검들, 교통사고로 만신창이가 된 주검들, 공사현장에서 납작하게 깔려 인간의 형체조차 잃어버린 주검들, 어느 해 이른 봄날 오후, 두 살배기 아기가 탄 유모차를 트럭이 덮쳤고, 붉디붉은 꽃잎들이 서늘한 길바닥을 수놓던 잔인한 기억…. 날이 갈수록 의식은 황폐해져갔고 공포는 자심해졌습니다. 인간의 존귀성에 의심이 들었고, 심하게 훼손된 주검은 사람이라는 인식조차 무뎌지면서 극심한 정신적 혼란이 찾아왔습니다. 급기야는 참혹한 주검들이 나와 내 가족과 환치되는 착란이 찾아왔을 때, 나는 몸서리를 치며 이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직서를 지니고 다니던 그해 여름밤이었습니다. 며칠째 지루한 장맛비가 내렸습니다. 길가에 주차된 트럭의 꽁무니를 들이받고 차 밖으로 튕겨져 나온 피범벅인 환자를 만났습니다. 부러지고 으깨져서 성한 곳이라고는 없었습니다. 천운이었을까요. 미세하게 맥박이 뛰었습니다. 그리고 손가락이 굼뜨게 움직였습니다. 구급차가 빗속을 정신없이 달렸습니다. 조금만 버텨주길 빌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맥박은 점점 희미해지는데, 환자의 손놀림은 계속되었습니다. 의식도 없는 와중에, 무슨 기력으로 저럴까 싶다가 설핏, 어쩌면 죽음이 목전에 와 있음을 본능으로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생의 가장 두려운 죽음 앞에 떨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환자의 손을 지그시 잡아보았습니다. 내 손이 환자에게 일말의 의지라도 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내 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손을 잡은 지 얼마안가 가느다란 맥이 멎었습니다. 병원 응급실에서 그의 참혹한 주검위에 하얀 천이 씌워졌습니다. 누군가의 아들이고, 남편이고, 아버지였을, 그러나 죽음의 공포를 홀로 맞서야했던 그의 운명이 가련했습니다. 그의 주검을 실은 이동침대가 병원직원들에 의해 응급실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내 앞을 지나칠 때 하얀 천 밖으로 빠져나온 그의 창백한 손이 보였습니다. 나도 모르게 그의 손을 잡아 하얀 천안으로 넣어주었습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한동안 멀어지는 주검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 잠잠한 의식에 찬물을 끼얹듯 어떤 생각이 번뜩였습니다. 그리고 여태껏 꺼림하고 두려워했던, 내 오랜 트라우마의 근원이었던 참혹한 주검과 스스럼없이 자발로 손을 잡은 모습에 사뭇 놀랐습니다. 참혹한 주검과의 접촉이 두렵기만 하여 수동적이고, 꺼려했던 마음의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참혹한 주검들도 죽기 전까지는 아름다운 꽃을 보면 감탄 할 줄 알고 슬프면 눈물을 흘리는 나와 똑같은 사람이었음을, 죽음의 극심한 공포에 홀로 떨다 죽은 가련한 영혼이었음을, 스러지는 한 생명을 지켜보고서야 깨우쳤던 것입니다. 참혹한 주검을 꺼려하기보다 연민의 정으로 다가가고 서야 트라우마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어느덧 고참의 옷자락을 놓치면 죽는 줄만 알았던 신참이 이제는 후배에게 옷자락을 내주는 중고참이 되었습니다. 갓 들어온 새내기 소방관들이 나와 같은 고통 속에서 힘겨워하는 모습을 볼 때면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그 주검들도, 누군가의 가족이고, 사무친 슬픔과 그리움을 누군가의 가슴에 남기고 떠난 사람이라고.’ ※ 한정된 지면 및 글의 흐름을 위해 세세한 응급처치 내역은 생략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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